실록이 본 〈대장금〉 속 의녀들
대장금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지만 의외로 실록에서 가져온 의녀들이 더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은 <대장금> 28화 이후부터 등장하는 의녀들에 대한 실록을 소개하는 글이다.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
- 중종 39년 10월 26일 中
〈대장금〉은 중종의 이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여의란 의녀 장금으로, 대장금이 실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의 행보는 픽션일 뿐이다. 의녀는 천민이었고, 특출난 공을 세우거나 중죄를 짓지 않는 이상 기록을 남겨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중종실록에는 '장금'과 '대장금' 두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 둘이 동일인물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다음 전교를 보자.
"의녀의 요식에는 전체아가 있고 반체아가 있는데, 요즈음 전체아에 빈 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받을 자를 아뢰지 않으니, 아래에서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대장금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에 출입하며 간병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 중종 19년 12월 15일 中
체아遞兒란 현직에 있지 않은 자에게 급료를 주거나 대우하기 위해 두는 직역을 말한다. 의녀는 내명부 궁녀와 달리 품계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년에 두 번씩 받는 미곡 외에 근무 기간만큼의 녹봉을 받는 형태의 체아직이 있었다. 그 중 전체아는 상시로 근무하고 급료의 전부를 받는 체아인데 중종이 직접 대장금을 지목한 것이다. 연산군 대에 기녀와 다름없이 변질돼버린 의녀의 본업을 몸소 바로 세우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테지만, 자신의 병세를 장금에게 전적으로 맡기던 모습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이런 뛰어난 의술로 인해 대장금은 의녀들 중에서도 기록이 많은 편이다.
"대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에 속하게 함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한 의녀인 장금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 중종 10년 3월 21일 中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의녀인 장금의 죄는 하종해보다도 심합니다. 산후에 의대衣襨를 개어改御하실 때에 계청하여 중지하였으면 어찌 대고에 이르렀겠습니까? 형조가 조율할 때에 정률을 적용하지 않고 또 명하여 장형을 속바치게 하니 매우 미편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중종 10년 3월 22일 中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3월 2일에 사망하자 사헌부에서 의원과 의녀를 벌해야 한다며 주청한 일이 있었다. 의녀가 말한 증상에 따라 약을 지어 올린 까닭에 의원 하종해보다 의녀 장금의 죄가 더 무겁다는 얘기가 나온 것인데, 중종은 장금이 왕후의 출산에 공을 세웠으므로 상을 주지는 못할 망정 벌을 내릴 수 없다 하였다.
"내가 여러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과 정포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
- 중종 28년 2월 11일 中
이날 의녀 장금이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상께서 삼경에 잠이 들었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들었다. 또 소변은 잠시 통랬으나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고 했다.
- 중종 39년 10월 25일 中
의녀 장금이 내전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하기下氣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약방에 전교하기를, "내가 지금은 하기가 평소와 같고 다만 기운만 약할 뿐이다. 지금 제조 및 의원과 의녀가 모두 왕래하고 있지만, 의원은 입직할 것이 없으며 제조도 각기 해산하여 돌아가라." 하니, 제조가 회계하였다.
- 중종 39년 10월 29일 中
이렇듯 장금은 29년에 걸쳐 종종 존재를 드러냈다.
제주의녀 장덕은 원래 성종 대에 이름난 인물이었는데 장금의 생도시절 스승으로 고독한 의녀 수련의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주인공의 스승답게 장덕의 의술은 치통과 충치, 부스럼 치료로 도성 안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얼마나 신통했던지 성종은 장덕이 죽고 나자 제주 목사 허희에게 잇병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 불문하고 올려보내라 하였다.
"잇병을 고치는 의녀 장덕은 이미 죽고 이제 그 일을 아는 자가 없으니, 이·눈·귀 등 여러가지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물론하고 초록하여 보내라."
- 성종 19년 9월 28일 中
작중에서도 장덕은 잇병을 잘 다뤘으며 충독을 이용한 치료법까지 연구하였다.
"어떻게 궁에서 수의녀까지 부를 수 있습니까?"
"얘기했잖아, 장덕이는 제주에서 이름난 의녀라고. 더군다나 종기나 부스럼에는 조선 최고의 의녀고, 또 이 치통에도 따를 자가 없어."
- <대장금>, 29화 中
내의원에 몹시 들어가고 싶어하던 장금에게는 내의원 출신 장덕이 멘토나 다름없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장본인은 스스로 제주에 틀어박혀 살았다. 진작 죽었어야 할 사람을 중종 대까지 살려놓았으니 대장금과 맞먹는 수준의 의녀를 같은 곳에 넣어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궁에 있을 체질이 아니라며 털털하고 괄괄한 장덕의 성격으로 개연성을 부여하였다. 결국 장금은 한양으로 돌아가 내의원에 입성하는데 성공하고 여러 내의녀들을 만나게 된다.
장금과 막역한 벗이었던 의녀 신비는 중종 17년에 등장한다. 자순대비의 중풍 증세를 치료한 의원들에게 상을 내리고 신비와 장금에게는 각각 쌀과 콩 10석씩 하사하였다는 기록이다. 또한 내의원 선배였던 의녀 은비는 중종 39년에 등장하는데, 중종의 지병에 차도가 보이자 내의원 제조와 도승지, 의원들에게 상을 내리고 대장금에게는 쌀과 콩을 도합 5석, 은비에게는 쌀과 콩 3석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기록이 현저히 적어 겨우 이름만 빌려 온 수준이지만 중종 대에 활동했던 의녀들임이 엄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