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2004.5. 〈대장금〉 김영현 작가 인터뷰
조선시대 醫女제도에 관심
―장금이를 주인공으로 하자는 드라마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누가 내놓았습니까.
『이병훈 국장님이오. 드라마 「허준」에 醫女(의녀)가 나와요. 그때 李국장님이 의녀제도에 관심을 가지셨나 봐요.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의녀제도에 관한 논문이 하나 나왔어요. 그 논문에 「장금」이라는 의녀 얘기가 나와요. 조선시대에는 지방 의녀제도가 잘 되어 있었거든요』
김영현(38)씨는 연출자 李丙勳(이병훈·60) PD를 「국장님」이라고 불렀다. 이병훈 PD는 MBC TV 드라마국 국장을 지낸 후 지난해 퇴사하여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허준」, 「商道」가 그의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천민인 의녀 장금이가 나중에는 中宗(중종)과 연모의 情을 나누는 사이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중종실록에 장금이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나와 있나요.
『조선왕조실록에서 장금을 검색해 보면 중종시대의 장금이와 선조시대의 70代 노파 장금이, 딱 두 명 나와요. 중종실록에 장금이가 열 번 나오는데, 주로 賞을 받은 기록이에요. 중종 임금이 쌀 몇 가마니, 콩 몇 되를 하사했다는 내용이에요.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어요. 중종 28년에 「大長今(대장금)」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중종 39년에 大臣들이 들어와서 「남자 의관들의 치료를 받으라」고 주청을 드리는데, 중종이 「내 병은 女醫(여의)가 안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말고 물러가라」고 해요. 그 대목에서 「아, 장금이가 임금의 주치의가 됐구나」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장금이가 임금의 주치의일 거라는 感만 가지고, 그 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겁니까.
『네, 나머지는 100% 제 상상력의 소산이에요. 사실 허준에 관한 기록도 그렇게 많지 않아요. 소설 「동의보감」 때문에 허준에 대한 기록이 굉장히 많은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허준이 中人이잖아요. 양반이 아닌 사람들의 기록은 실록에 나타나지를 않아요』
―앙상한 역사적 사실에 살을 붙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참고한 사료가 있나요.
『사료라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2002년 4월에 이병훈 국장님과 처음 만난 뒤 탄탄한 원작이 있는 드라마를 쓰려고 애를 썼어요. 신인작가가 50부작을 원작 없이 한다는 건 큰 모험이니까요. 「商道」나 「茶母」는 다 원작을 각색한 거예요. 2002년 11월에 醫女 이야기를 만들기로 최종 결정했고, 원작 없이 4개월 만에 50회분의 「시놉시스」를 완성했어요』
―李PD가 여러 인터뷰에서 『김영현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천재적이다』, 『초반 원고를 보고 작가의 상상력과 발상에 감탄했다』고 얘기를 했던데, 어떻게 같이 일하게 됐습니까.
『과찬의 말씀이죠. 원래 「올인」, 「商道」 같은 작품을 쓴 최완규 작가와 일하고 싶어하셨는데, 그분이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저와 일하게 된 겁니다. 崔작가가 저를 李국장님께 추천했다고 해요. 저도 다른 분과 「미니시리즈」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뜻밖에 「대장금」을 맡게 됐어요』
―이병훈 PD가 제작과정에서 작가 김영현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행운이죠. 李국장님은 결정이 굉장히 빠르고 방향제시를 정확히 하세요. 好不好(호불호)가 분명하세요. 서로 일하려면 「된다, 안 된다」가 확실해야 해요. 아무리 제가 쓰고 싶어도 李국장님이 싫어하시는 걸 제가 계속 쓸 수는 없어요. 제가 절대 안 써지는 걸 국장님이 요구한다고 쓸 수도 없고…. 李국장님과 그런 커뮤니케이션이 아주 잘 됐어요. 고증은 100% 국장님께 맡겼어요』
―「대장금」 이야기의 전반부는 음식 만드는 궁녀들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는 醫女에 관한 겁니다. 수라간 나인 장금이는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겁니까.
『그것도 순전히 제 상상의 산물이에요. 의녀 얘기로 곧바로 들어가면 「허준」하고 비슷하다고 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을 했어요. 여자 의사와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음식이 아닐까 싶었어요. 補陽食(보양식)이라는 말도 있고, 음식과 의술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기획단계에서 제가 「음식 얘기로 갔다가, 의녀 얘기로 가자」고 했어요.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둘로 쪼개지잖아요. 이건 대단히 위험한 거예요. 저도 「그렇게 가서 흥행이 될까」 하고 자신이 없었는데, 李국장님께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셨어요』
日本 만화 「초밥王」에서 힌트
―전반부에 궁녀들이 요리를 만들어서 임금과 왕비 등에게 평가를 받는 장면이 많이 나오더군요. 음식競演(경연)을 시키자는 생각은 어떻게 했습니까.
『일본 만화 「초밥왕」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요리에 관한 만화는 전부 시합이에요. 「이거 재미있겠다」 생각했죠』
―궁궐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죠(웃음). 궁녀들 사이엔 엄격한 上命下達(상명하달)의 위계가 있었어요. 상궁들이 윗전 어른들도 휘어잡으려고 들 정도였어요. 문정왕후는 계비로 들어왔잖아요. 실록을 보면 상궁들이 굉장히 텃세를 부린 듯한 느낌이 나는 데가 있어요. 문정왕후만 그런 게 아니라, 어린 왕비가 들어오면 상궁들이 일단 휘어잡아서 자기 말을 잘 듣게 하려고 했던 부분도 있어요』
―궁녀들과 궁중음식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셨겠지요.
『아, 그건 김영숙 교수님이 쓴 「궁중풍속연구」라는 책이 도움이 됐어요. 궁녀들의 생활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궁중음식을 공부하려고 「궁중음식대관」, 한의학 공부를 위해 「동의보감」을 여러 번 읽었어요. 지명은 「동국여지승람」을 뒤졌고, 인터넷에서 「유황오리」 같은 아이디어를 찾아내기도 했죠』
―「대장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게 눈에 띄더군요. 임금이나 왕족들이 고풍스러운 표현을 쓰지 않고, 음식에 관한 표현도 현대적이고…. 의도적으로 현대적인 언어를 많이 쓴 건가요.
『제가 궁중생활, 궁중언어에 정통하질 못하니까요(웃음). 제가 궁중어를 연구해서 글을 쓰려고 했다면, 스토리를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들었을 거예요. 「수라를 저신다」 같은 임금에게만 쓰는 표현들이 많아요. 특정 명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도 꽤 많고요. 예전에는 설탕을 「설당」이라고 부르고, 밀가루를 「진가루」로 불렀더군요. 그런 말들이 들어가면 새롭게 느껴지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만 고풍스럽게 썼어요』
―궁중에서는 왕이 식사를 하고 나서, 그 음식을 아랫사람들이 먹죠.
『궁녀들이 먹는 거예요. 상궁이 먹고 나인들이 먹고 이런 식으로 내려가죠』
―왕이 먹은 음식을 대신들에게 내려보내는 것 아닌가요.
『대신들은 연회가 있어 임금이 차려 주라고 했을 때만 궁중음식을 먹죠. 왕의 음식을 왕의 여자인 궁녀들이 먹는 거죠. 재미있는 것은 궁녀가 들어오면 그 이름을 임금이 지어 줬대요. 자기 여자니까. 의녀들 이름은 장금이, 덕금이, 말금이, 계금이 이런 식이었어요』
―그동안 궁녀들을 왕의 性的 노리개, 예비 妃嬪 후보 정도로 다루는 드라마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대장금」에서는 궁녀들이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는 전문직으로 그려졌죠.
『제가 그린 궁녀들이 사실에 더 부합할 거예요. 왕이 아무리 性의 노리개로 삼는다고 해도, 그 대상이 100명이 넘겠어요, 200명이 넘겠어요. 궁녀들이 500∼600명 정도 되는데 옷 만드는 사람, 음식하는 사람, 비서기능을 수행하는 사람 등이 더 많지 않았겠어요』
왕과 천민의 사랑, 感이 왔다
―왕을 보좌하는 지밀상궁, 중전을 보좌하는 제조상궁 사이의 알력과 권력투쟁이 「대장금」에서 재미있게 그려졌죠.
『제조상궁이 내명부의 비자금 관리를 맡아요. 의정부와 내시들이 왕을 보좌한다면, 내명부에서는 상궁들이 중전을 보좌하여 관리를 하는 거죠. 대통령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권력을 안 가질 수 없잖아요. 궁녀와 내시들은 왕과 왕비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인데, 권력을 발휘하지 않았겠어요. 상궁들이 대부분 대신들하고 의남매 관계를 맺는대요. 권력이 있으니까 대신들이 인맥을 형성해 두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士大夫들이 자기 세력확장을 위해 왕과 왕비 주변에 상궁을 집어넣고 하는 장면들이 나오는 거군요.
『제가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했어요. 그랬을 것 같지 않나요?(웃음)』
―중종이 드라마에서 굉장히 인간적이고 섬세한 인물로 묘사됐더군요.
『중종은 우유부단한 왕이었어요. 선비들을 많이 죽였고, 反正(반정)으로 權門勢家의 등에 업혀 왕위에 올랐으니 고뇌가 많지 않았겠어요. 그걸 그린 거죠. 실록을 보면 중종시대에 醫女에 관한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중종이 醫女제도를 활성화시켰어요. 중종이 연산군을 이어 왕위에 올랐잖아요. 연산군 때 醫女들을 전부 기녀화해 버렸어요. 「약방기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니까 그걸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던 거죠. 중종이 민생 부분은 이전 시대로 되돌려 놓으려고 애썼어요. 그런 지시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창기를 혁파하라」, 「기생을 혁파하라」는 지시가 많았고, 「醫女를 절대로 기생으로 하지 마라」는 전교가 대여섯 차례 나와요. 그러면서 醫女에 대한 교육이 강화됐고, 중종 때 유난히 뛰어난 醫女가 많이 나와요. 저는 「대장금 때문일 거야」라고 상상했어요』
왕이 천민과 사랑나누는 기발한 설정
―醫女는 궁궐 내에서 상궁이나 나인들보다 훨씬 지위가 낮은 천민인데, 중종이 천민과 연모의 情을 나눈다는 설정이 참 기발합니다.
『그건 「의녀 장금이가 어떻게 왕의 주치의가 되고, 대장금이 됐을까」 상상하다가 그런 상황을 설정했어요. 醫女가 왕의 주치의가 됐다, 정말로 뛰어난 의술만 가지고 될까? 아무리 그래도 시대가 시댄데. 임금이 장금이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끼고돌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왕이 장금이를 후궁으로 삼지 않고, 민정호에게 보내는 게 가슴 절절하더군요. 중종이 「후궁으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사내로서 너를 옆에 두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은 요즈음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같았습니다.
『그렇죠(웃음). 아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왕이 좋아하면 그냥 품으면 되는 거죠. 마음에 들면 그냥 다 후궁으로 삼으면 되니까요』
―왕과 醫女의 사랑이라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대장금」을 더 좋아하게 됐겠죠.
『장금이와 중종의 사랑을 더 길게 그리고 싶었어요. 이 부분을 좀더 길게 그렸어야 하는데, 기획 단계부터 굉장히 感이 왔던 부분이거든요. 대한민국 최초로 왕과 보통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거든요』
―제일 클라이맥스가 됐을 부분인데 왜 길게 안 썼나요.
『일단 시청자들이 너무 복수를 갈구하더라고요. 최상궁에 대한 복수를…. 그러다 보니 그 부분이 너무 늘어났어요. 醫女 장금 부분을 전체의 60%쯤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40%쯤으로 줄었어요』
―민정호가 당상관으로 승지직에 있는 사람인데, 결혼을 안 했을 수 없는 위치죠. 대장금이 승지의 정실부인이 되는 걸로 결말이 맺어졌는데, 조금 어색하더군요.
『민정호는 부인이 있었는데 사별한 걸로 설정을 했어요. 이 부분을 얘기해 주는 내레이션이 여러 번 대본에 들어갔는데 빠졌어요. 금영이의 입을 통해서 민정호가 喪妻한 사실을 알리려고 했죠. 민정호가 喪妻한 상태라고 해도, 장금이는 첩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예요. 나중에 장금이가 당상관의 지위를 갖는 대장금의 칭호를 받았으니까, 그냥 정실부인이 된 걸로 밀고 갔는데 어디서고 「딴지」를 안 걸기에 그냥 갔죠』
살인적인 집필 기간
―마지막에 「장금이가 제왕절개 수술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놓고 논쟁이 있었죠. 과연 그 시절에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제왕절개 수술을 강행했더군요.
『장금이가 계속 도전한다는 메시지가 꼭 필요했어요. 중종이 실제로 臟(장)폐색증으로 죽었어요. 臟폐색증은 수술만 하면 살거든요. 그런데 중종이 안 했잖아요. 그래서 장금이 수술을 한다는 걸 부각하기 위해서 제왕절개로 간 거예요.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고』
평균 시청률 45.8%에 최고 시청률 56.8%, 방송 3週째부터 25週 내내 주간 시청률 1위 고수. 지난 3월23일 종영한 MBC 드라마 「大長今(대장금)」이 만들어 낸 기록이다. 월·화요일 저녁에 켜진 텔레비전 10대 가운데 5대에 이 드라마가 떠 있었다는 얘기다.
지난 4월2일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김영현씨를 만났다. 빨간색 점퍼에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음으로 쓴 史劇(사극)이 이룬 성과에 아직도 얼떨떨해했다.
『제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그것 때문에 괜히 괴로워질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MBC는 이 신진 작가에게 창사 42주년 기념 대작의 집필을 맡기는 게 내키지 않아 한 달 동안이나 결재를 미뤘다고 한다. 결국 사극의 백전노장인 이병훈 감독을 믿고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대장금은 500년 전 조선조 중종시대(1506~1544)에 활약했던 한 의녀의 이야기다.
수없는 역경을 헤쳐나가는 장금의 이야기는 어려운 시절을 사는 보통사람들에게 큰 힘을 줬다. 「대장금」은 소설·만화·동화로도 출간됐고, 휴대폰 벨소리와 궁중음식 붐 등 다양한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종영 후 일주일 내내 잠만 잤다』는 김영현 작가는 『드라마 집필을 도와준 후배들과 곧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드라마 시작할 때 몇 회분까지 써 두었나요.
『10회분까지 써 놓았는데, 13회 때부터 「초읽기」가 시작됐어요』
김영현씨는 일주일에 원고지 560장 분량의 글을 썼다.
『토요일에 대본을 넘겨요. 이틀은 대강의 스토리 라인을 잡고, 이틀은 보조작가들과 장면 구성 회의를 해요. 그리고 수·목·금요일 3일 동안 하루에 12~14시간씩 써요. 쓰다 보니 주인공이 등장하는 신이 70%를 넘겼어요. 이영애씨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거의 피를 말리는 작업인데 어떻게 견뎠나요.
『살인적이었죠. 펑크나면 어쩌나, 압박감이 엄청 나죠. 밥 먹으러 나가는 것 외에 외출을 거의 못 해요. 펑크내지 않으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거죠. 대본이 늦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토요일 밤 12시에 대본을 건넸죠』
김영현씨는 『중간에 한상궁 부분이 늘어나는 바람에 결국 4회 연장을 했지만, 욕심 같아서는 10회 정도 연장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한상궁을 죽이지 말라」는 팬들의 목소리가 대단했었죠. 시청자 반응에 따라 대본이 바뀌기도 하나요.
『한상궁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너무 뜨거워서, 죽이면 혹시 시청률이 내려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죠. 그런데 시청자들은 금방 잊어버리더라고요. 왜냐하면 죽어 버리면 다시 살릴 수가 없잖아요(웃음). 한상궁을 죽이면서 50% 넘었던 시청률이 40%까지 떨어질 걸 각오했어요』
―방영을 연장했다면 어떤 얘기를 더 하고 싶었습니까.
『장금이가 중종의 주치의로 활동하는 모습, 임금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
시청자들, 사랑보다는 일에 관심
―시청률이 이렇게 뜰 걸로 예상을 했나요.
『이렇게까지 기대를 안 했어요. 25%만 나와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방송사에서는 25% 넘기고 방영 시간대에서 1등만 하면 만족하거든요』
―「대장금」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감성과 코드가 맞아떨어진 건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요소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1회에 한상궁이 장금이 엄마를 살려 주는 장면과 장금이 어머니와 장금이 아버지의 멜로 부분이 함께 나왔어요. 저는 멜로 쪽에 포커스가 맞춰질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한상궁이 장금이 엄마에게 편지 보내주는 얘기에서 다들 울었다는 거예요. 멜로보다 장금이 엄마와 한상궁과의 우정이 힘을 받는다는 얘기예요. 「수라간 나인 장금이가 쫓겨났다가 다시 궁에 의녀로 들어갔을 때 얘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남자들도 이 드라마를 많이 봤다고 하더군요.
『남성 시청률이 「올인」이나 「왕건」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어요. 남자들은 「대장금」에서 뭘 재미있게 봤을까 저도 궁금해요』
―月刊朝鮮 남자 기자들의 얘기가 일치해요. 대사가 절절했고, 왕과 장금의 사랑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고 해요.
『왕이 자기 고백을 하는 게 좀 특이하긴 했죠. 제가 「이거는 진짜 될 거야」라고 굳게 믿었던 부분이에요. 왕이 의녀와의 사랑을 독백으로 하면 이건 될 거다… 사극에서 한 번도 왕이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우리나라는 드라마 천국입니다. 아침부터 드라마 방영하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드라마에 열광하는 걸까요.
『우리 드라마가 중독성이 아주 강해요. 미니시리즈의 경우 일주일에 연속 2회 방영하는데, 일본은 한 번밖에 안 해요. 그러면 그 다음 週에 가면 「이전에 뭐했지」 잊어버리게 되죠. 일본 드라마는 디테일을 강조하는 데 비해 우리 드라마는 스토리를 강조하죠. 물론 디테일을 강조하는 드라마도 있지만. 「실미도」, 「친구」 같은 영화가 다 스토리를 강조한 거예요. 우리나라 드라마는 스토리가 강하고, 그걸 시청자들이 좋아해요』
―어떤 스타일의 글을 좋아하세요.
『저도 디테일보다는 스토리를 강조하는 편이에요. 시청자들이 스토리가 강한 얘기를 좋아하니까요』
―상궁들이 많이 나오는데 金작가는 어떤 상궁과 비슷한 성향인가요.
『저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민상궁처럼. 민상궁이 나중에 최고상궁이 되는데 튀지도 않고, 눈치 보고, 딱 소시민이에요. 개인적으로 멋있다고 생각한 캐릭터는 정상궁이에요. 어느 한쪽에 박혀 있다가 자기가 맡아서 후배에게 넘겨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자리를 수락하고 차고 들어가서 그 일만 딱 만들어 두고 빠지죠. 그런 사람이 많으면 좋은 사회가 되겠죠. 그런데 사실 다 자기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 되죠』
「어머니의 마음」을 간직하라
―한상궁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모델이 누구입니까.
『저희 엄마가 모델이라면 모델이죠. 딸은 다 엄마를 좋아하지만, 존경하는 면이 있거든요. 엄마가 초등학교 교사셨는데 어릴 때부터 뭘 시키지 않고 관찰만 하시는 편이었어요. 관찰하다가 잘못 가면 톡 치기만 하시고 절대로 뭘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TV 보는 걸 장려하셨죠. 저는 시험공부하려는데 엄마가 데리고 나가서 영화를 보게 해줬거든요. 그런데 그게 高단수인 거죠. 그래도 어쨌든 할 애는 하는 거고』
―가장 애착이 가는 등장인물은 누구입니까.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주인공 장금이와 최상궁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과 단순함이란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인물이죠』
―작가가 「대장금」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요.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어머니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애초부터 궁녀 집단을 가족으로 그리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연생이와 장금이는 동기간이고, 한상궁과 장금이의 관계는 모녀지간이었던 셈이죠. 「어머니」를 강조하면 여성을 옭아매려 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여성의 가장 큰 강점은 「어머니性」이라고 생각해요』
절절한 대사가 가슴 울려
―「대장금」에 나오는 대사 가운데 인상적인 것이 많더군요. 상궁 금영이가 민정호에게 밥상을 차려 주면서 한 말은 여인의 애틋한 마음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더군요.
『금영이 대사 쓰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캐릭터가 명쾌하지 않아서. 최상궁 같은 사람은 대사 쓰기가 쉽거든요. 명쾌한 자기 주관이 있잖아요. 그런데 금영이는 말을 세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힘들었죠. 그런데 의외로 금영이 대사에 반응이 컸어요. 금영이 대사를 네티즌이 뮤직 비디오처럼 만들어서 인터넷에서 유행됐었죠. 사랑을 얻지 못하는 금영이에게 시청자들이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 다들 좋게 보신 것 같아요』
―어떤 남자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드라마에 나오는 민정호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이해심 많고, 문화적인 공감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편할 때 같이 영화 보고 한 시간 정도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등장인물의 대사 가운데 「훈계조」가 많더군요. 그런데도 무난하게 소화가 된 모양이죠.
『세상이 재미있게 돌아갈 때에는 누가 훈계조로 얘기하면 짜증나거든요. 정상궁 대사라든지 한상궁 대사라든지 쓰면서 「이거 공자님 소리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시청자들이 받아들여 준 거예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니까 李국장님이 통제를 안 한 거고, 저도 계속 톤을 유지했어요. 작가가 그런 훈계조의 대사를 많이 쓴다는 것은 사실 좋은 게 아니에요』
―名대사가 많았는데 작가 스스로 마음에 남는 대사는 어떤 게 있나요.
『어린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라고 얘기하는 대목, 정상궁이 한상궁에게 「네가 원칙을 지키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라」고 했던 대목이 좋아요』
김영현씨는 정상궁의 유언인 『나는 궁에서만 산 것이 억울하다. 그러니 나를 구름 위에 뿌려다오. 비가 되어 흘러 흘러서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며 세상 구경이나 하고 다닐란다』, 정상궁이 궁을 나가며 한상궁에게 말한 『두려울 게다. 무서울 게야. 그러나 약하다 생각하면 동산도 태산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강하다 생각하면 돌풍도 한낱 스치는 바람일 뿐이야. 그동안은 내가 너의 바람막이가 되었다만 이제는 네가 태산이 되어야 해. 돌풍이 되어야 해』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지난 3월4일 16회 한국방송프로듀서賞 시상식에서 「대장금」은 TV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대장금」이 성공하면서 출연자들도 덩달아 주가가 올라갔다. 한상궁役의 양미경은 데뷔 이후 처음으로 팬클럽이 생겼으며, 컴필레이션 음반모델, CF 모델 프로그램 촬영차 訪北하기도 했다. 민정호役을 맡은 지진희,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 임현식·금보라, 장금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된 박은혜·김소이 등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캐스팅을 할 때 작가는 어느 정도 개입하는지 궁금했다.
『스토리는 제가 주관했고 캐스팅은 이병훈 국장님이 하셨죠. 국장님이 캐스팅을 누구할지 죽 적어 가지고 오셨어요. 저는 생각했던 이미지랑 너무 틀린 사람에 대해서는 싫다고 얘기하는 정도였죠. 유명 배우들 캐스팅이 어려운데다, 다들 긴 드라마를 안 하려고 하니 캐스팅이 더 어렵죠』
―이영애씨 섭외하기 어렵지 않았나요.
『정말 느닷없이 된 거예요. 이영애씨가 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계속 영화만 했으니까. 조연출이 그냥 한번 지나가는 투로 물어봤는데 하겠다고 했대요. 이영애씨가 뭘 확실하게 아는 배우 같아요. 여자가 드라마에서 타이틀 롤을 맡기가 힘들거든요. 남자의 보조역할을 했잖아요. 그런데 「대장금」은 여자의 일생이니 확실하게 이영애씨 작품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 거 아닌가 생각돼요. 이영애씨가 하게 되면서 남자 주인공도 원래 내정됐던 사람이 아닌 지진희씨로 바뀌었어요』
―『이영애씨가 너무 예뻐서 조선조의 천민인 상궁이나 醫女에 잘 안 어울리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많았죠.
『이영애씨가 맡은 게 결과적으로는 더 나았어요. 너무 억척스럽게 보이는 여인이 그 풍파를 헤쳐갔으면, 어른들 말씀처럼 「그 여자 참 팔자 드세다」고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 이영애씨가 했기 때문에 귀한 느낌이 들면서 드라마가 잘 흘러갔어요』
「대장금」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유에 대해 김영현씨는 『세상살이가 힘들어질 수록 성공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해석했다.
『인터넷 게시판에 「대장금을 보고 힘을 얻었다」는 글이 많아서 요즘 힘든 분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대본 쓰기 싫을 때, 어떡하든 좀 미루어 보려고 할 때 게시판을 읽었어요』
대장금을 즐겨 보는 시청자들은 「愛好장금」이라는 코너를 운영해 드라마에 지지를 보내고 비판도 했다. 제작진과 출연배우도 꾸준히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네티즌들과 대화하는 「쌍방향 드라마」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대장금」은 여성계의 전폭적인 찬사를 받았다.
MBC_PD협회는 「대장금, 그 성과와 사회문화적 함의」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고, 여성계는 「대장금」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분석하여 박수를 보냈다.
『여성계에서 「대장금」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는 건 이전 史劇에 나오는 여자들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동안 드라마에서는 여자들이 질투하고 시기하는 걸로 많이 나왔는데, 「대장금」에서는 여자가 주체적이었고 서로 돕잖아요. 남자 이상의 우정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하더군요. 그리고 멜로 부분보다 일이나 성공에 관한 얘기가 더 많았죠. 의도한 건 아니지만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해요』
「대장금」은 한국홍보에도 한몫 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5월부터 대만에서 「대장금」이 방송되면 한국관광공사는 「전통음식 패키지」를 선보여 관광객을 불러 모을 계획이다. 10월에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유럽을 겨냥해 주요 도시를 돌며 「대장금」을 활용한 관광 마케팅을 펼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TV 보고 자란 영상세대의 작품
김영현씨는 일곱 살 때부터 TV를 보기 시작한 영상세대이다. 어릴 때부터 TV와 영화를 몹시 좋아했고, 지금도 일을 안 할 때는 일주일에 영화를 10편씩 본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착실한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연세大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꿈에도 글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는 글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고등학교 시절 문학소녀도 아니었어요. 글을 쓸 거라고 전혀 생각을 안 해봐서 습작이라는 걸 한 번도 안 했어요』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되었나요.
『이게 운명인가 보다 생각해요. 경제학과니까 은행이나 증권회사에 취직하려고 했죠. 그런데 대학생활을 허술하게 한데다, 제가 어리숙해서 취업 시기를 놓쳤어요. 그때부터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언론사 시험 공부를 했어요. 일년 반 정도 공부했는데 그게 바로 백수생활이죠. 너무 고통스러워서 때려치우고 한국산업경제연구원 산하 잡지사를 들어갔어요. 경제 기사 쓰는 일이 나에게 안 맞고 재미도 없었어요. 한길사 부설기관에서 방송작가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심심해서 다니게 되었어요. 6개월 다니다가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죠. 바로 회사를 그만둔 뒤 MBC 아카데미에 들어갔지요』
이 일을 계기로 1991년에 구성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었으나 오락 프로그램에 배정되었다. 「재미」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다. 2년 만에 오락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가 되었으나, 드라마로 방향전환을 했다. 드라마를 처음 시작한 것은 30세 때. 「테마게임」과 「애드버킷」을 공동집필했다.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연락이 와서 미니시리즈를 썼다. 35세 때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SBS에서 미니시리즈 「신화」를 썼다. 시청률은 11%대, 첫 작품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 다음에 쓴 드라마가 「대장금」이다.
김영현씨는 밤을 새우며 글을 쓰는 스타일이어서 늘 오전 7시에 잠자리에 들어 오후 1~2시에 일어난다.
「대장금」은 회당 제작비가 1억5000만원으로 총 120억원이 들었다. 광고비와 대만으로의 해외수출, 인터넷 다시 보기, 상표권(떡방, 쌀, 전통주, 음반, 벨소리, 게임, DVD) 등을 합쳐 현재까지 올린 수입은 250억원 정도이다. 중국과 일본 등동남아의 많은 나라가 수입을 원하고 있는데다 인터넷 VOD 서비스가 늘어나 수입은 더 올라갈 전망이다.
―드라마가 수입을 많이 올렸으니 작가도 많이 벌었을 것 같은데요. 몸값이 두 배로 올랐다는 보도가 나왔던데요.
『두 배로 올라도 신인이라 그렇게 많지 않아요. 시청률이 올랐다고 더 받는 것도 없고요. 50회짜리 연속극을 쓰기로 계약한 게 방송국이 제공한 인센티브죠. 어차피 지금 제가 번 돈은 다 빚이에요. 앞으로 써 줘야 되니까』
―재방송이나 해외판매할 때도 고료를 좀더 받잖아요.
『중간에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재방송을 안 하더라고요. 인터넷 다시 보기를 하면 방송국이 수입을 올릴 수 있잖아요. 인터넷 다시 보기로 iMBC가 10억원 벌면, 작가는 400만원인가, 500만원인가 받아요. 한 번 볼 때 작가에게 5원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더 들어오겠지요』
후속작품도 이병훈 PD와 하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다. 두 사람 다 「김종학 프로덕션」과 계약관계이다.
『史劇 통해 영웅을 배우면 좋을것…』
―어떤 작품을 할 건가요.
『저는 사실 사극보다 시대물을 좋아해요. 일제시대나 해방 전후, 전쟁 기간이랄까. 영화로 치자면 「닥터 지바고」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서사적인 작품이 좋아요. 이번에 사극을 했지만, 아직도 좀 부담스러요. 공부를 해야 하는 입장이죠. 물론 시대극도 마찬가지지만.
앞으로 KBS에서 「장보고」를 극화한다더군요. 옛날에 대륙을 휘어잡던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李국장님도 「연개소문」 한다고 하시고. 「아, 이제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 좋아요. 「장보고」와 「연개소문」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지만 후원이 잘 되어서 우리가 영웅을 보고 배우면 좋을 것 같아요』